3.1 독립혁명 민족대표 33인 선정과정

 

3.1운동은 어느 한 집단의 움직임이 아니라 전 민족의 거사이어서 어느 집단에서든지 자의로 대표자를 내어놓는 정도로는 안 되겠고 국내외를 막론하고 민족의 대표자로 공인되지 않으면 국민들의 신뢰 없이 추종될 리도 없고 세계적으로도 민족적 거사로 인정받기 어려우니, 민족대표 선발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처음 기독교 측에서 선정 작업을 시작할 때는 민족대표 수가 많을수록 좋겠다고 100명 정도를 생각하며 대표자를 교섭하기로 하고 우선 서울시내 명사들부터 교섭을 시작하여 심지어 원로대신으로부터 이완용이까지 접선하였으나, 전부가 독립선언을 하면 당장 체포될 거라고 하여 거절했고, 모두가 애국운동을 하면서도 독립을 선언하면 당장 죽일 것으로 생각되던 때라 모두가 거절하였다.

한사람도 포섭하지 못하자 종교지도자들끼리 할 도리밖에 없다고 생각한 지도자들은 서북지방 장로교출신 6인은 더 이상 포섭하지 못하였고 감리교 대표로 평양에서 상경한 신흥식 목사가 서울에서 오화영 목사를 포섭하여 26일까지 5명밖에 결정이 안 되었으나 27일 정오 감리교 4인과 이갑성 등 5인이 합세하여 감리교 9인과 장로교 7인이 결정되었으니 종교인 외에는 1인도 포섭하지 못하였고 이중 이갑성은 30대 초반이라 민족대표가 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고 경상도 대표를 포섭하려 내왕하였으나 한사람도 포섭이 안 되자 기왕 죽을 것은 당연한데 내라도 민족대표가 돼야겠다고 참가하므로 경상도 대표가 되었다.

천도교는 이미 손병희, 최린, 권동진, 오세창은 주모자들이라 위계가 분명하니 2월25일부터 27일 사이에 마친 천도교 기도회와 고종의 인산을 보려고 상경한 천도교 간부 림례환, 나인협, 홍기조, 양한묵, 권병덕, 김완규 , 나용환, 박준승, 이종훈, 홍병기 등과 오세창은 천도교 월보과장 이종일에게 독립운동계획을 말하고 찬동을 얻었다. 이로써 15인이 되어, 기독교대표 16인, 불교대표 한용운, 백용성 2인과 더불어 33인이 선정되었으나 선언서에 서명순서를 정할 때 이승훈이 이 순서는 죽는 순서야 하면서 의암 손병희가 먼저 쓰고 기독교 장로회 대표로 길선주, 감리교 대표로 이필주, 불교대표는 백용성이 먼저 쓰고 그 다음은 가, 나, 다 순으로 쓰기로 하였으나 그대로 되지는 않았다.

 

기독교대한감리회 김행식 원로목사

(민족대표 33인 김병조 목사의 아들)

 

 

 

 

우리가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선언문을 마련할 것을 의논할 때, 일선에서 운동하던 사람으로는 학생・청년까지 모두 합하면 70여명이었습니다. 처음에는 70여명 모두가 한꺼번에 선언서에 날인하고 세계에 선포하려고 하였습니다.

함태영 목사는 예전에 고등법원 판사였기 때문에 법을 잘 알고 있었으며, 함태영 목사의 말은 “우리가 이 선언서를 한번 써서 뿌린다고 해서 금방 독립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필경 저 일본사람들이 우리에게 어떤 극한의 일을 할텐데, 일본법으로 우리 70여명이 한꺼번에 다 죽어버리면 다음에 계속 할 사람이 없지 않느냐?”고 제안을 하였다. 함태영 목사의 의견에 따라 제1회, 제2회, 제3회로 나누기로 하고, 제1회에 들어가서 사형으로 죽고, 제2회에 또 죽고, 제3회에 또 죽고 독립할 때까지 우리가 희생하더라도 하자고 결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25명이 먼저 결정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모두 먼저 죽겠다고 합니다. 나도 먼저 죽는다. 나도 1회에 죽는다고 해서 26명-27명-28명-30명-31명-33명까지 왔던 것입니다.

 

민족대표 33인 최후 생존자 이갑성 선생 증언

 

3.1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의 민족대표는 모두 종교인으로 – 불교 지도자가 2명, 천도교 지도자가 15명,  기독교 지도자가 16명이었다.

 

 

3.1독립운동의 주체가 33인이냐 민중이냐 하지만 민중이란 지도자 없이는 오합지졸에 불과하다. 그래서 모체는 종교요 주체는 33인이요 민중은 지체로서 서로 뗄 수 없는 하나이다. 3합이 하나로 완성품이기에 어느 한 쪽이 중시되거나 무시될 수 없는 공동작품이기에 우리 역사에 3.1독립운동의 역사가 더욱 빛나는 것이며, 1919년 3.1 독립혁명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19년 4월13일 수립되었고, 오늘날 그 법통을 헌법 전문에 명시해 계승해 오고 있는 것이다.

또한 3.1 독립혁명 당시 – 1919년 3월과 5월까지 3.1독립운동으로 인해 살해된 사람들이 7,509명이며, 부상을 당한 사람이 15,961명이고, 검거된 사람들이 46,948명에 이르렀다.

 

서울문화원 박은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