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북지방 기독교 독립운동 사적지 ③ 여운형 선생 묘역

 

여운형(1886.05.25~1947.07.19)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며 저술가로서, 1900년 미국과 영국 유학에서 돌아온 7촌 종숙의 영향으로 감리교 학교인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기독교의 평등사상을 수용하여 노비들을 해방시키고, 교육·계몽 활동을 하다가 도산 안창호의 연설에 감화되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여훈영은 1945년 8월 건국준비위원장을 역임하고, 이후 조선인민공화국의 부주석을 역임하였다.   건국준비위원회는 1945년 8월 15일부터 9월 7일까지 여운형, 안재홍 등을 주축으로 일본으로부터 행정권을 인수받기 위한 조직이다.  한반도 남부는 여운형과 안재홍 등을 주축으로, 북부는 조만식 등이 주축으로 결성되었다.

 

▲ 건국준비위원회 수립 1945년 8월17일 기독교청년회(YMCA)

 

이 무렵 여운형은 감리교회선교사들이 세운 개신교 교회인 상동교회의 인사들을 만나 교제하면서 교회에 출석,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여운형은 배재학당에 입학한 뒤 1년 만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학당에서는 날마다 학생들을 예배당에 출석시키고, 이것을 어기는 학생들은 교실에 남아서 한 시간 동안 자습을 시켰는데, 몽양 자신도 반 아이들과 남산에 놀러가느라 주일 예배를 빠졌다가 예배에 불참하였다가 담임선생에게 체벌을 받았다. 당시 몽양은 담임교사가 정직한 학생은 벌주고, 오히려 속인 자들을 봐 주었다고 보아, 부당한 체벌에 자퇴로 반발하였다.

 

 

그는 1906년 양평군 양평읍 묘골에 개신교 교회를 세웠는데, 그 후 여운형은 문중 일족들을 전도하여 잇달아 기독교인이 되게 하였다.  1911년부터 평양 장로교 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간 공부하였으며, 1911년부터 1913년까지 승동교회의 전도사로 활동하였다.  그 뒤 공산주의를 접하고 그 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나, 그는 유물론을 거부한데다 끝까지 기독교인으로서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여운형을 이해할 때는 진보적 사고를 가진 크리스챤 민족주의자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1945년 8.15 광복을 맞아 안재홍 등과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우익 진영과 미군정의 반대로 실패했고 이후 좌우파 합작 운동을 추진하였다.  여운형은 1945년 8월 광복부터 1947년 7월 암살되기까지 2년간 총 10차례의 테러를 당하다가 1947년 7월19일 암살당했다.

 

사적 위치 : 서울 강북구 우이동, 우이신설선 2번 출구에서 100M 거리에 위치한다.

 

서울문화원 박은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