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100일 추모예배, 이웃사랑 핵심은 약자 사랑 (2014.07.24)

 

30여 기독교단체와 시민, 향린교회서 세월호 참사 100일 추모예배

 

세월호 참사 후, 100일째가 되던 24일 저녁 7시. 뜻을 함께한 개신교 목회자들과 신학생, 평신도지도자들이 향린교회로 모여들었다. 인도를 맡은 정태효 목사(목정평상임의장/예장통합)는 이사야 40장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는 부름의 말씀과 ‘뜻없이 무릎 꿇는’ 찬송가 515장으로, 세월호 참사 100일 추모예배를 개회하였다.

 

▲ 세월호 참사 100일 추모예배 인도하는 정태효 목사

 

▲ 세월호 참사 100일 추모예배 대표기도 이정한 신학생

 

대표기도를 맡은 감신 사람됨의신학연구회 이정한 신학생은,“생명보다 이윤을 추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이 시대의 제사장들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음과 “인간을 인간이 아닌 짐승으로 만드는 자본의 노략질에 사람들의 삶은 이윤을 위한 도구가 되고 말았”음에 대해 현 시국상황을 주님께 아뢰고, “304명의 영혼이 우리 곁을 떠나고 100일이 지난 이 때.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리라하신 주님의 약속을 기억하며, 세상 끝날까지 주님과 동역하며 고난 받는 이웃과 함께 하겠습니다.” 굳게 다짐하며 기도하였다.

 

▲ 억압권력을 꺾으시는 평화의 왕 말씀 선포하는 박득훈 목사

 

이날 이사야 9장의 말씀으로 ‘억압권력을 꺾으시는 평화의 왕’을 선포한 새맘교회 박득훈 목사(교회개혁실천연대공동대표)는, “이웃 사랑의 핵심은 사회적 약자를 사랑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둠의 세력이 지배하는 안식일 법과 성전체제에 도전”하셨음을 지적하였다. (추모예배에 선포된 말씀을 정리하여 기사 하단에 개재하였다.)

 

▲ 세월호로 희생된 유예은 양의 어머니 박은희 전도사

 

이 자리에는 세월호에서 희생된 고 유예은 양의 어머니인 박은희 전도사(화정교회)가 “착하게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작 착한 사회를 만들지 않으면,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이런 일을 겪게 된다.”며 “304명의 아까운 목숨이 진한 먹물이 되어, 참사 전과 후를 분명하게 획으로 그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유가족 증언을 하였다. (예은이 엄마 박은희 전도사의 증언은 이번 주 따로 정리하여 기사화할 것이다.)

 

▲ 세월호 참사 100일 추모예배 축도하는 문대골 목사

 

이어 신학생들이 ‘아침이슬’을 부른 후, 문대골 목사(기독교평화연구소고문)가 제단에 올라, “어떤 경우에도 역사의 절대주권을 양보하지 않으시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그 주권을 역사 속에 구현하시기 위해 종놈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우리로 그 예수의 또 다른 몸으로 살게 하시는 성령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이, 세월호의 비극 속에 간 사랑하는 우리 아이들의 영혼 위에와 이 역사의 죄짐을 짊어져야하는 우리 모두들 위에, 종의 입술을 통해 전달된 대로 민주주의를 확실하게 이 땅 위에 확립하는 그날까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였다.

 

▲ 민주쟁취기독교행동 결성대회 사회를 맡은 진광수 목사(고난함께)

 

 

추모예배 후 기독교 단체들은 진광수 목사(결성대회준비위원장)의 사회로 ‘민주쟁취기독교행동’ 결성대회를 열었다. 또한 “우리는, 고난 받는 이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다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놓으신 예수의 삶을 따르고자 한다”는 민주쟁취기독교행동 결성 선언문을 발표하고, 스톨을 멘 목회자들과 십자가를 선두로 시가행진을 시작하여, 을지로를 지나 시청 앞 광장에 운집한 추모 시민들의 물결에 합류하였다.

 

▲ 세월호 참사 100일 추모 예배 후, 민주쟁취기독교행동 시가행진 ①

 

‘세월호 참사 100일 추모예배’에 참가한 단체들은 다음과 같다. 전국목회자정의평화협의회, 성공회 정의평화사제단, 기장 생명선교연대, 감리교시국대책위(감리교정의평화위원회, 감리교농촌선교목회자회, 감리교농촌선교훈련원, 감리교청년회전국연합회, 감리교청년회전국연합회 동우회, 감리교여성지도력개발원, 감리교목원민주동문회, 감신 도시빈민연구회, 감신 사람됨의신학연구회, 감신 국정원대책모임, 감신 탈한얼패, 고난받는이들과함께하는모임), 한신 민중신학회,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한국기독청년학생연합회,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 진실을 찾는 신학생 모임, 장신 평학생회, 예수살기, 이명박구속과박근혜퇴진을위한기독교평신도시국대책위, 찾는이광명교회, 새시대목회자 모임, 수원지역목회자연대, 수원생명평화기독교행동, 경기생명평화기독교행동

 

▲ 세월호 참사 100일 추모 예배 후, 민주쟁취기독교행동 시가행진 ②

 

▲ 밤 9시, 세월호 참사 100일 시청 앞 광장에 모인 추모 시민들과 함께하였다.

 

 

억압 권력을 꺾으시는 평화의 왕

(세월호 참사 100일 추모예배에서 선포된 박득훈 목사의 설교를 정리하였다)

 

세월호 참사 100일이 지나면서 그동안 우리가 많이 염려 했던 것들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아픔을 느끼게 됩니다. 애도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애도가 아니라 잊어버리기 위한 망각의 애도가 되면 어떡하나 그런 염려가 우리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권력을 쥔 자들은 그 혐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치 시계의 초침이 망가져서 시계가 선 것처럼, “사회의 어느 일부분에서 기능장애가 발생했기에 이런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라고 끊임없이 분위기를 몰아 왔습니다. 급기야는 그동안 속으로만 생각했던 것들을 이제 하나 둘 노골적으로 얘기하기 시작합니다. “왜 아직도냐. 해상에서 일어난 교통사고에 지나지 않는데 그걸 왜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느냐?” 하면서 본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이사야 9:2)

 

빛은 도대체 무슨 역할을 했기에 압제당하는 자에게 그런 큰 기쁨을 가져다 줄 수 있었을까. 본문은 명확히 말하고 있습니다. 메시야가 미디안을 공격하여 진압하시던 날처럼 그들을 내리누르던 멍에를 부수고,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던 통나무와 압제자의 몽둥이를 꺾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고통에 처하게 된 원인과 진실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무능해서도 아니고, 그들이 게을러서도 아니고, 그들이 운이 나빠서도 아니고, 진정한 이유는 단 하나. 멍에를 가난한 자들에게 지우고, 통나무와 몽둥이로 그들을 위협하고 길들이는 – 그런 불의한 권력자들에게 억압당해왔기 때문인 것을 드러내 보이신 것입니다.

어둠을 밝히고 무엇이 진실인지를 가려내는 것이 바로 빛의 역할입니다. 그래서 메시아는 항상 그런 빛의 역할을 하시면서 역사 속으로 들어오시는 분이십니다. 진실을 밝히시고 밝힘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 멍에를 부수고 통나무와 몽둥이를 꺾어버리고, 압제당하는 자들을 해방시켜주십니다. 그래서 그들을 어둠과 고통과 죽음의 그늘에 앉게 만든 세력들에게서 권력을 확실하게 빼앗아 무력화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윤리학자 스티븐 모트(Stephen Charles Mott)는 이사야 9장의 이 빛을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여기서의 빛이란 낭만적인 것이 아니다. 이 빛은 어둠과 대항해서 싸우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어깨의 채찍과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실 것입니다. (이사야 9:4)

 

그럼 빛의 역할은 무엇인가. “피 흘리는 전쟁터에서 압제자의 몽둥이를 꺾는 것이요. 정의를 세우는 것이다.”라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힘없는 사람들을 내리누르는 멍에,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통나무, 압제자의 몽둥이. 이런 상징적인 표현들은 과연 무엇을 구체적으로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사회적 약자들을 억압하고 짓누르고 착취하는 불의한 권력들, 그리고 그 권력을 정당화하는 이념들, 그리고 이념에 따라서 만들어진 제도와 체제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바로 ‘어둠’인 것입니다.

그러한 권력과 그러한 이념과 그런 제도는 항상 자신의 본 모습을 감춥니다. 매우 탐욕적이고 야만적입니다. 그렇지만 자기들이 마치 아주 교양스러운 것처럼 스스로를 아름답게 포장합니다. 그래서 ‘어둠’인 것입니다.

 

이웃 사랑의 핵심은 사회적 약자를 사랑하는 것이다.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을 정말로 사랑한다고 칩시다. 한 끼 식사를 사줬습니다. 옷을 벗어줬습니다. 그것으로 끝날 수 있을까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 그 사람의 고통을 내가 온 몸으로 함께 느끼고 아파하고 우는 사람. 그와 내가 하나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반드시 그가 왜 그런 자리에 있게 되었는지, 왜 그가 그렇게 아파하는지, 왜 자살의 충동을 느껴야만 되는지, 그가 왜 자기 자신에게서 그렇게 한없는 자괴감을 느끼는지, 또 그렇게 만든 세력이 도대체 무엇인지 그것을 반드시 보게 돼 있습니다.

저는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그 제도들과 거짓된 이념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직 진실한 사랑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우리 세월호 유족들도 말씀하시는 것처럼, 그런 사랑은 삼성도 할 수 있고, LG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인들에게, 우리 교회에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기대하는 사랑은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 아이들이 왜 이렇게 죽어야만 됐는지, 그것이 원인이 무엇인지 그것을 캐묻고 그 진상을 밝혀주는 것을 우리에게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요구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것을 너무나 깊이 아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처럼 인격적으로 온 몸과 마음을 다해서 내 이웃을 사랑하면서 어디까지 갔느냐, 안식일 법에 도전했습니다. 성전체제에 도전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안식일 법과 성전체제에 도전하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은 분명히 보셨습니다. 그 당시 유대 백성들 특히 서민들이 왜 그렇게 억압당하고 고통당해야만 하는지를 명확히 보셨습니다. 본래 안식일 법의 정신은 남종이나 여종이나 심지어는 짐승까지도 주인과 함께 하나님 앞에 동등한 존재로 사랑받고 쉼을 얻고, 그 존엄성을 인정받는 날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류와 자연이 하나님 안에서 존엄성 있는 존재인 것을 확인하는 날. 그날이 바로 안식일 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안식일의 뜻입니다.

그러나 유대 권력자들은 그 안식일의 기본정신을 외면했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일하지 않는 날로 바꾸어버렸고, 일하지 않기가 쉬운 사람들 – 돈 많은 사람, 권력을 쥔 사람은 안식일에 일하지 않는 것을 잘 지켰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으로 그 사회의 이정표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짓밟고, 그들의 존엄성을 짓밟아 온 불의한 권력자들의 죄는 어디론가 온데간데없이 증발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잘 지키는 이 시대의 주인으로서 지도자로 우뚝 서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안식일 법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지 아니하고 사람이 그 안식일 법을 위해 존재하며, 그 안식일 법을 주관하는 자들이 수많은 사람들을 그렇게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을 보시면서 예수님은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냐? 악을 행하는 것이 옳으냐?”하면서 그 사악한 안식일법 제도에 대해 강력하게 도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인 성전체제를 뒤집어 엎으셨던 것입니다.

불의한 세력은 모든 종교를 이용해서 자기들의 권력과 자기들의 부를 축적해나가는 그런 수단으로 삼아왔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요청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요청되는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왜 민주주의를 위해서 주님 앞에 우리를 헌신하고 뜻을 합해야 하는가. 그 이유가 너무나도 분명한 것입니다.

 

이 시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십자가

 

우리는 지난 몇 년을 지나면서 실질적으로, 형식적인 민주주의 절차도 국정원을 비롯한 국가기관을 통해 유린당하는 것을 우리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마치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처럼, 그럴듯한 이념 그럴듯한 법과 질서와 제도를 통해서 자기들을 정당화하고 권력을 영구화하며, 자기들의 부를 축적하기 위한 그런 사악한 뜻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빛으로 찾아오신 예수님을 우리가 진실로 만나고, 그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한다면, 더 이상 이 땅의 권력자들이 그 야만을 교양으로 포장하는, 그럴듯한 말로 백성들을 속이고 사회적 약자들을 처박는 그 참상을 우리가 눈으로 보고만 있을 수는 없겠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사회적 약자들을 사랑한다면, 그들을 때리고 있는 몽둥이, 그들을 짓누르고 있는 무거운 짐들, 그 권력과 정당화하는 이념과 그 이념에 세워진 제도를 향하여 우리가 강력한 저항의 목소리를 내며, 또 그 권력을 그들의 손에서 뺏어서, 마땅히 그 권력을 가져야 될 우리 국민들에게, 특별히 사회적 약자들에게 그 권력을 돌려주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이며, 그 민주 쟁취를 위한 힘찬 발걸음을 오늘 저녁에 다시 내딛길 바랍니다.

주님 저희들에게도 그들에게 진정한 기쁨을 줄 수 있는, 그 길을 걸어나갈 수 있도록, 저희들의 마음을 뜨겁게 해주시고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무리 어려워도 아무리 외로워도. 누가 뭐라 해도 주님과 동행하며 끝까지 걸어갈 수 있는 저희들 꼭 될 수 있도록 한 마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박득훈 목사 (새맘교회)

연세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영국 런던 바이블칼리지 신학과 졸업

영국더럼대학 기독교사회윤리학 박사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교회개혁실천연대 공동대표

 

박은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