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69년 ①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만나는 것이다 (2014.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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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는 4대 정보수사기관 – 국가정보원, 국군기무사령부, 검찰청, 경찰청이 있다. 여기에 언론과 방송이 합쳐져 5대 정보기관이 된다. 이중 수집한 첩보를 정보처리 하여 시민에게 보고하는 곳은, 뉴스를 담당하는 신문사와 방송사뿐이다.
4대 정보기관이 국가시스템을 유지하는 장치라면. 신문과 방송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 제1조 1항을 실현시키는, 국민이 주권자로서 판단할 수 있게 하는 제1기초. – 국민의 정보기관이다.
▲ 시내를 달리던 버스 안에서 찍은 평양의 거리
기자는 현재 서울연회 청장년선교회 임원으로 또 남북경협기업비상대책위 실장으로 활동하면서 수많은 경제협력 기업인들, 통일부 공무원, 정치인, 시민단체, 교단에서 파송한 중국선교사, 조선족 목회자, 해외 크리스챤 NGO들과 교류하고 있다. 따라서 보수 복음주의 진영의 선교담당자에서부터 진보 에큐메니컬 진영의 선교담당자까지 대북정책과 대북선교에 관련된 모든 노선을 들여다보고 있다.
모든 정보요원들은 수집된 첩보를 크로스체크(대조검토) 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대북선교에 관련해서는 크로스체크하지 않고 어느 한쪽의 말만 듣는 모양새다. 사람은 보려고 하는 것만 보게 된다. 예전에 어느 당대표와 인터뷰를 하던 중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대화하는 것이지. 생각이 같으면 따로 말할 필요가 없어, 같이 행동하면 되니까.”
진실과 맞부딪치기 위해선, 용기를 내서 그 반대진영 사람들과도 이야기를 해야 한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낮선 것에 대한 거부감은 본능적으로 발현된다. 그렇게 익숙한 것에 길들여져 계속 익숙한 길로 다니다보면 놓여진 올무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 올무는 다름 아닌 스스로가 만든 고정관념의 함정이다. 그리고 고정관념이 무서운 것은, 자기가 편견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데 있다.
때문에 끊임없는 크로스체크가 필요하다. 정보원이 입수한 첩보를 대조검토 없이 지휘관에게 보고하게 되면, 정보의 부재로 말미암아 작전계획이 틀어지고 틀어진 계획으로 교육훈련이 진행됐기에, 실전에서 참패하게 된다. 당당뉴스 기자가 보고하는 지휘관은 바로 신도여러분들이다. 정보는 평신도와 특별신도(?)의 차별이 없이 물 흐르듯 전달될 것이다.
▲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는 검증시스템
1899년 평안남도 하리(下里) 칠골에 세워졌던 하리교회는, 김일성의 모친 강반석 집사가 섬기던 교회로, 강반석 집사는 하리교회 강돈욱 장로의 둘째딸이다. 강돈욱(1871~1943) 장로는 평양 창덕소학교를 설립하고 헌신한 교육자이기도 하다.
김일성(본명 김성주)은 1923년부터 2년 동안 평안남도 대동군 용산면 하리 칠골에 있는 외가댁에 머물며, 외할아버지 강돈욱 장로가 교장으로 있던 창덕소학교에 다녔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더 그리워지는 것이 어린 시절이듯, 김일성 역시 노년에 어린 시절을 더욱 회상하게 된 것 같다. 네덜란드 국적의 이교열 목사가 80년대 정부 승인을 받아 남북을 왕래하며 김 주석과 교제하던 때 –
김일성은 주일학교 다니던 소학교 시절을 회상하며,“내가 어머니 손잡고 다니던 예배당이 아직 있는지 모르갔구만. 이 목사가 좀 알아봐 주시구레.” 하고 부탁했고, 이교열 목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평양에 교회를 세우면 북한이 국제사회에서 유리해질 것을 설명하며, “평양에 교회를 세우시면 어떻겠습니까?” 제안하였다.
▲ 좌측부터 유원중학교 1학년 김일성, 어머니 강반석 집사, 외조부 강돈욱 장로
다음은 탈북민 박에스더씨의 증언이다.
“어머니 강반석(1892~1932)은 만경대로 시집 온 뒤에도 종종 하리교회에 온 것이 김일성 회고록에 나옵니다.” 그리고 “칠골교회는 김일성이 만년에 그곳에 나가, “예전에 이 부근 어디에 우리 어머니가 다니시던 교회가 있었는데……” 말한 것이 계기가 되어, 하리교회가 있었던 정확한 자리를 찾아 그 자리에 세운 교회입니다.”
김일성이 외가에 가지 않을 때는, 집근처(평양 만경대구역) 송산교회를 다녔다는 것도 그의 회고록에 나온다. 그러나 송산교회가 있던 자리는 현재 김일성군사대학이 위치해 있다.
칠골교회는 백여명이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작은 교회로 1989~90년경에 건립되었으나, 아들 김정일이 거의 완공단계에 이르러 다시 짓는 등,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1992년 11월에야 완공되었다. 평생 김일성이란 이름에 가려졌던 김성주는 말년에 칠골교회를 다니다 1994년 사망하였다.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을 거쳐 북한에서는 ‘최고 존엄’에 등극한 그였지만, 노년에 그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나이가 들수록 또렷이 떠오르는 기억은, 그저 철부지 어린애로 외가에서 어머니 손을 잡고 교회 다니던 때가 아름다웠던 것이다.
1988년 대외 선전의 일환으로 봉수교회와 장춘성당을 건축했음에도, 봉수교회와 얼마 안 떨어진 같은 만경대구역에, 하리교회가 있던 바로 그 자리에 1992년 칠골교회를 세운 것은, 말년의 수령 김일성이 어머니의 손을 잡고 가는 어린 김성주(金聖柱)와 만나게 된, 북한체제에서는 말로 할 수 없는 고백이 담긴 성전인 것이다.
▲ 주일예배가 끝난후 칠골교회 성가대원들이 나와 배웅하고 있다
▲ 칠골교회에서 남과북의 성도들이 기도하며 예배를 준비하고 있다
통일부 공무원 30년, 종교담당관 L 과장의 증언
“L 선생, 바쁘시구만. 올해 우리 벌써 몇 차례 만나는 거야?”
평소 남북 공동행사로 여러 차례 만나던 K 선생을 양각도호텔 로비에서 우연히 만났다. 아마도 이번 남측 참관단의 평양 일정을 감독하기 위해 현장에 나온 것 같았다.
“건강해 보이시네요. 잘 지내셨죠?” 반갑게 인사를 나누다 문득 생각이 나서 물었다.
“내일 칠골교회에서 예배드리는 단체가 있는 것 아세요?”
“안 그래도 남북이 같이 뭐 예배를 드린다나 해서, 나두 가 볼 생각입네다.” 교회를 가본 적이 없는 K 선생이 궁금했던지 내게 이것저것 물어보다 말했다. “칠골교회를 20~30분 참관하구, 주체사상탑 등 평양 시내 일원을 관광하는 일정이 돼 있구, 밤에는 아리랑 공연을 보게 되어 있더구만.”
성만찬을 포함한 예배 시간을 20~30분밖에 계산하지 않았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북한 인솔자들은 일단 계획이 섰으면 그렇게 해야만 하는, 융통성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다.
“K 선생, 교회 예배는 적어도 1시간 이상 소요됩니다. 특히 성만찬 예식까지 있다는데, 1시간 이상 보장해 주어야 됩니다.” K 선생에게 특별히 부탁을 했다.
그다음 날 저녁, K 선생을 양각도호텔 바에서 만나 칠골교회 예배에 대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하, 이 양반들, 1시간이 다 돼 가도록 끝내질 않더구만. 길세 우리 보장성원(안전관리요원)들하구도 옥신각신하더구만.”
불안한 마음에 내가 물었다.
“칠골교회 행사는 잘 됐어요?”
K 선생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가 “내버려 둬 봐라” 했지. 아, 긴데 이 양반들 떡두 먹구 술두 마시고 노래두 한참 하구 재밌더만!” 그는 신기한 구경이라도 한 듯 재미있게 이야기를 했다.
나도 웃으며 그를 칭찬했다. 그리고 마음으로,
‘K 선생, 당신도 언젠가는 떡도 먹고 술도 마시며 감사기도를 드릴 날이 오길 바라요.’라고 기도했다.
▲ 양각도호텔에서 찍은 평양시 ① (자료제공 기독교대한감리회 수유교회)
▲ 양각도호텔에서 찍은 평양시 ② (자료제공 기독교대한감리회 수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