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지명을 연구하는 관점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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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 위치한 한강유역은 큰 산과 강, 들판이 위치한 예부터 인간이 생활하기에 최적의 명당이었다.
때문에 한강유역에는 구석기시대로부터 신석기와 청동기시대를 거쳐 초기철기문명이 나타났고, 그 유적들이 오늘날에도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 한강 상류 삼각산(북한산) 기슭의 구석기시대 거주민 생활상 디오라마 (서울 한성백제박물관)
한강유역의 거주민들은 청동기와 초기철기문명을 바탕으로 성읍국가를 형성하고 마한(馬韓)의 일부로 있다가, BC1 경 북쪽에서 내려온 철기문명의 부여족 온조세력과 결합하여 새로운 부족연맹국가인 백제(百濟)를 건국하였다. (처음엔 국호를 십제(十濟)라고 하다 더 많은 부족이 연합하여 백제(百濟)가 된 것이다.)
백제의 수도였던 위례성은 한강 북쪽과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백제의 위례성은 한성이라고도 불렸는데, 이곳에서 500년 역사를 운영하는 동안 백제는 삼국 중 최강국으로서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 하북위례성이 지금의 서울시 경역을 벗어나 있지 않고, 하북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북한산성(동국여지비고), 혜화문 밖10리 지점의 한양동(정약용, 김정호), 세검정 일대(이병도), 중랑천 일대(최몽룡)설 등이 있다. 」
「 하남위례성도 지금의 풍납토성(風納土城), 몽촌토성(夢村土城)과 하남시 이성산성(二聖山城)과 춘궁동(春宮洞) 일대가 유력하여 오늘의 서울권역과도 밀접해있다. 」
– 최상철 교수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 초기 백제의 도읍지 하남 위례성으로 추정되는 풍납토성 디오라마 (둘레 3.5Km 한성백제의 왕성)
백제가 한성을 포기하고 남천한 뒤 한성지역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치열한 쟁탈전을 벌이다가 마침내 6세기 중엽 신라의 수중에 들어가고, 신라는 한강유역을 장악한 것을 계기로 7세기 중엽 삼국을 제패할 수 있었다.
남북국시대 신라에서는 하북한성(河北漢城)은 한양군(漢陽郡)이 되고, 하남한성(河南漢城)은 한주(漢州)가 되어, 한양군을 한주에 속하게 하여 강북보다 강남의 위상을 더 높게 하였다.
한강유역의 하북하남(河北下南)의 비중은 한반도를 통일한 고려시대에 비로소 하남(河南) 한주(漢州)보다 하북(河北) 한양군(漢陽郡)의 위상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고려의 수도 개경을 가장 가까운 남방에서 받쳐주는 도시로 주목 받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지명도 양주(楊州)로 바꾸게 하였고, 양주는 나날이 발전하여 천도(遷都)까지 생각하기에 이른다.
▲ 1750년대 해동지도에 나타난 양주목 – 해동지도는 국정을 결정할 때 쓰인 군현지도집이다.
고려 중기부터는 한양 명당설이 널리 퍼지면서, 또 고려 말기에 이르러서는 “이씨가 한양에 도읍하리라”는 이씨(李氏) 천명설(天命設)이 돌자, 고려 조정은 한양 삼각산 아래 무성한 오얏나무(李=자두나무) 지역에 벌리사(伐李使)를 보내 베게하였다. 이곳이 오늘날 서울 강북지방에 있는 번동이다.
조선 중기 18C 중엽만 해도 대동여지도에 벌리(伐理:베는마을)라고 기록되던 것이, 갑오개혁 당시 번리(樊理)로 바뀌더니, 현재 번동(樊洞)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 조선 중기 사산금표도(四山禁標圖)에 나타난 상벌리(上伐里)와 하벌리(下伐里). 벌리 주변에 우이천과 수유현도 보인다. (1765년 영조41년)
한양이 명당으로서 이씨(李氏)가 주인이 된다는 믿음은 결국 이성계(李成桂)에 의해 달성되었다. 아무리 고려 조정에서 벌리사를 보내 강북지방 오얏나무(李)를 베어댔어도 말이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는 데 앞장섰던 이유도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렇듯 우리가 선 이 땅 곳곳에는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과 민중의 삶과 애환이 녹아들어, 이것이 지명에 스며들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서울문화원 박은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