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의 발상지, 불교 사찰 천진암(天眞庵)의 숨겨진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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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교회가 존재하기까지 우리가 알지 못 했던 수많은 순교자의 피가 이 땅에 뿌려졌다. 종교인 33인이 민족대표로 세워진 3.1 독립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며, 현대 한국 그리스도교의 발상지가 된, 불교 사찰 천진암(天眞庵)의 숨겨진 역사를 알아본다.
1800년 정조 승하 1년 후,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학살 당하던 때, 천진암의 승려들 역시 신유박해의 고난을 당하였고, 그리스도인들을 숨겨준 죄로 참수를 당한 스님들이 있었다.
▲ 1750년대 제작된 해동지부 광주부 고지도(古地圖). 조선 정조 시기(재위 1776~1800), 한국 그리스도교의 발상지가 된, 유교 선비와 불교 승려가 더불어 성서를 연구하던, 불교 사찰 천진암(天眞庵)이 나타나 있다. 오늘날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앵자봉 기슭에 해당되며, 현재 그 절터가 남아 있다.
1780년 천진암의 강학회는 서학(西學)을 서교(西敎)로, 성경에 대한 학문적 지식을 종교적 신앙으로 전환시키는 큰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은, 사신들을 통해 청나라로부터 유입된 성경과 신학서를 연구해온 이벽(李蘗)의 역할이 컸으며, 그리스도교에 대한 지식을 동료 학자들에게 전하여, 우리나라에 자생적 신앙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 현대 한국 그리스도교의 발상지 불교 천진암(天眞庵)의 기둥돌과 계단돌
천진암(天眞庵)은 한때 300여 명의 스님이 수행하던 거찰이었으나, 조선 말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학살 당할 때, 천진암에서 성경을 연구하던 최창현, 정약종, 이승훈 등이 참수되었고, 10여 명의 스님들도 그리스도인들을 숨겨 주었다는 이유로 참수당했으며, 사찰은 관군에 의해 폐사(廢寺) 되었다.
현지 마을 노인들을 취재한 ‘대원’지의 기사에 따르면 “(유학자인) 그리스도인들을 숨겨준 탓으로 관가에서 폐사시켰습니다. 당시 천진암에서 수도하던 스님들도 십여분이 참형되었습니다.”라고 증언하고 있다. 1945년 광복 이후 천진암을 왕래하던 신도들의 증언으로 볼 때 천진암은 구한말 중창과정을 거쳐 1980년 초반까지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서울문화원 박은석 기자